출처 : 픽사베이 무료 사진(도쿄 가부키쵸)

최근에 기억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걸 느낀다. 오늘 애인이 알려준 추억 이야기를 더듬기 힘들 때 너무 무서웠다. 몇 달 정도 전의 일인데 전혀 기억이 안나는 건 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기에 매일은 아니지만 자주 글을 남기려고 한다. 

 

사실 여기 블로그엔 정말 사적인 용도는 웬만해선 적지 않고 오로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용도로만 사용했었다. 그래서 글도 매우 제한적이고 딱딱하거나 고집이 있었다. 나는 성격이 매우 강박적인 편이다. 제한이나 규정을 어떨 땐 너무 지킨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자연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너무 두려웠다. 인터넷 세상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게 너무나 큰 리스크를 안는 건 당연하지만,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라는 자의식 또한 너무 멍청하고 방어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제부터 이런 글을 여기에 자주 올릴 것 같다. 왜냐하면 최근에 나이가 들어서인지, 글을 쓰기가 정말 어렵다. 한때는 기자로도 활동했었고 글쓰기가 즐거워서 야근을 자청했었는데 이젠 글쓰기라고 하면 겁부터 난다. 이곳은 이제 내 글쓰기 전쟁터, 그중에서도 가장 선두에 서 있을 듯싶다. 

 

사실 이곳을 바꾸려는 이유는 다른 이유도 있다. 내가 왜 여기에 글을 쓰게 되었는가는 2010년의 일본 유학 시절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는 한국인이 한 명도 없고, 일본 친구들이나 외국 친구들을 사귀기 전에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건 포가튼 사가 패치였다. 과거에 내가 했던 게임 패치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그 우울함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무언가를 바라고 한 게 아니었는데 당시에 포사클럽과 블로그에 올려주신 많은 분들의 후기가 여기까지 나를 끌고 왔다. 그리고 욕심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이것과 엮인 많은 일들은 내가 그냥 편히 마음을 먹고 이해하면 될 문제들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된다. 그래서 비우려고 한다. 패치 제작은 나를 더 집착하게 만들고 소중한 사람과 있었던 많은 추억을 잊어버리게 한다. 

 

나는 2008년, 2010년. 총 2년간 일본 유학을 다녀왔었다. 당시 일본은 한국과는 어마어마한 자본의 차이가 있었다. 세련되었고, 사람들은 많은 치장을 했었다. 내가 만난 한국 여성 분들은 일본에서 화장 기술을 배우고 자랑했던 기억이 난다.(하얗고 빨갛게 팬더 같은 화장이었는데 그게 한국에서 먹히니깐 그렇게 했었나 보다) 당시만 해도 머리를 염색을 한 사람들을 한국에선 보기가 쉽지 않았는데, 일본은 당시에 굉장히 다양하게 염색을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지금 한국이 일본의 소득 수준에 근접하면서 느끼는 점은, 자본주의가 성숙된 소위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가 과연 행복할까라는 질문이다. 내가 당시 일본에 있을 때 현지의 사람들은 아르바이트를 2~3개를 하면서(주 2일, 3일짜리, 당시 일본의 노동법은 모르지만 쪼개기 알바가 많았다) 엄청 피곤하게 일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화려하게 치장한 사람들은 지하철이든 혹은 거리든 거리감이 많이 느껴졌다. 무채색의 사람들, 그리고 엄청나게 감정 노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시민들. 그런 삶이 지속되는 사람들이 만든 선진국이 과연 좋은 건가라는 질문은 당시 유학생이던 나에게 계속 던져졌고, 그걸 한국에서는 제발 따라가지 않았으면 싶었다. 

 

그리고 2022년 4월 1일 서울의 어느 지하철에서 나는 12년 전 일본에서 느꼈던 그 무채색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때의 감정보다 지금이 더 슬픈 이유는 내 나라인 점도 있지만 충분히 타국의 상황을 봤음에도 이 나라의 위정자들은 그걸 답습하려고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니, 그들은 그걸 더 바라지 않을까. 나라나 시민이 잘 되는 것보다 자기 배만 불리면 되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널릴 대로 널렸으니깐. 혹은 그들도 자본주의의 한계에 그저 매달린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저 세계의 큰 파도의 흐름에 우리가 삼켜지고 있는 것이라면, 공멸하는 세계 속에서 각자도생의 시기가 온 게 아닐까.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에겐 속아주고, 누군가에게는 나눌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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